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팀 던컨 (문단 편집) === NBA 데뷔 이전 === 원래는 버진 아일랜드의 국가대표급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1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강타한 [[허리케인]] "휴고"로 집을 잃고 더불어 버진 아일랜드의 유일한 국제규격 수영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괴로움에 수영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팀 던컨의 매형이 슬퍼하는 던컨에게 괴로움을 잊고자 농구를 배우게 했고 던컨 역시 흥미를 느끼고 농구를 시작했다.[* 농담같지만 연습할 수영장이 없어져서 바다에서 수영을 했어야 되는데 상어가 무서워 수영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사실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우연히 [[알론조 모닝]]이 그의 친구들과 버진 아일랜드로 놀러와 농구를 한 적이 있는데 팀 던컨과 농구를 했고 마침 그 때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코칭스탭이 그를 보고 장학금과 입학을 제의했고 던컨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ACC 컨퍼런스의 중하위권 학교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시절엔 데이브 오돔[* 1941년 10월 9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골즈보로 출생. 1965년 길포드 대학교 졸업 후 고향 골즈보로 고등학교 코치를 시초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76년부터 3년 동안 웨이크 포레스트대 코치로서 칼 테이시 감독을 보좌하다 1979년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 감독으로 데뷔했고, 1983년 버지니아 대학교 코치로 옮겨 6년 동안 테리 홀랜드 감독을 보좌했다. 1989년부터 12년 동안 웨이크 포레스트대 감독으로 재직하며 던컨과 토니 러틀랜드 외에 로드니 로저스, 랜돌프 칠드리스, 로렌 우즈 등을 발굴/육성시켰다. 200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컬럼비아 캠퍼스로 옮겨 임기 7년 동안 2004년 NCAA 전국대회 진출, 2005 및 2006년 NIT 2연패를 각각 일궈내며 마이크 보인턴(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감독), 타렌스 킨제이, 레날도 벌크만, [[리카르도 포웰]] 등을 육성했다. 아들로는 라이언 오돔(현 유타 주립대학교 감독)이 있는데, 그는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카운티 캠퍼스(UMBC)를 지휘할 적인 2017-18 시즌에 NCAA 전국대회 32강까지 가게 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감독의 가르침을 받았다.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 농구부를 전국대회 단골 포지션으로 유지시켰다. 3학년 때에는 토니 러틀랜드[* 1998-99 시즌 당시 KBL 팀 [[청주 SK 나이츠]]의 외국인 선수로 뛰었다.] 등과 함께 뛰며 [[매사추세츠 대학교|UMASS]]의 [[마커스 캠비]]와 함께 NCAA 최고의 인사이더로 인정받고 있었다. 당시 3학년이던 캠비는 1996년 드래프트에 얼리엔트리하여 토론토에 2번픽으로 지명받지만, 던컨은 1년 더 남게 된다.[* 던컨이 굳이 4년을 끝까지 마친 이유는 바로 그의 어머니가 임종시에 던컨에게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던컨의 어머니는 꼭 그가 대학을 마치기를 바랬고,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던컨은 2,3학년때에도 충분히 상위픽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년을 채웠다.] 어쨌든 대학에 남게 되면서, 대학생 신분으로 드림팀3와 대학선발과의 연습경기에 참여하였다. 실질적인 대학대표팀의 원맨 리더로, 곧 리그에서 라이벌이 되는 드림팀3의 센터 3인방([[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과 모두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연습경기라 드림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던컨은 그 셋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이미 탈 NCAA급 선수로 인정받고 NBA에서도 통할거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NBA는 아직이 아닐까라고 평가하던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 경기를 통해 확 바뀌고, 던컨의 대중적인 인지도도 크게 올라간다. 1997 드래프트는 그야말로 명실공히 팀 던컨 드래프트라 할 정도로 그의 1순위 지명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 수준으로 당연시되었다. 특히 리빌딩이 절실했던 [[보스턴 셀틱스]]는 공공연하게 팀 던컨을 노리고 있음을 드러내며 탱킹을 통해 동부 컨퍼런스 꼴찌를 획득했고, 트레이드를 통해 [[댈러스 매버릭스]]의 지명권도 얻어와 1픽을 뽑을 확률을 무려 35% 수준으로 확보해놓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확률이 확률이었던지라 당시 많은 언론이 던컨의 셀틱스행에 초점을 맞췄고, 던컨 본인 또한 셀틱스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